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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당찬 여자 최인혜 - 下 -:경인통신

경인통신

작지만 당찬 여자 최인혜 - 下 -

조홍래 기자 | 기사입력 2014/03/16 [11:54]

작지만 당찬 여자 최인혜 - 下 -

조홍래 기자 | 입력 : 2014/03/16 [11:54]
구미의 모 전자에서는 1년 동안 일하며 종자돈을 마련해 수청동에 현대빌라를 샀다.
가장 오래 근무한 곳은 삼성인력개발원이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화 교육팀 주임강사로 열심히 가르치며 최고의 선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외대 등에서 시간강사를 하다가 1997년에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인생에 가장 혹독한 시련(?)이 시작됐다.
모든 것을 영어로 하는 과정이어서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입학할 당시 임신 3개월이었는데 임신을 했다고 하면 떨어질까 봐 9살짜리 딸 하나만 가진 엄마로 영어면접에 응시했다.
심사위원이 어려운 MBA과정을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해내려고 하느냐고 묻기에 태연히 사람이 하는 일이니 다 해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입학을 하고 나서 공부가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됐는데 뒤돌아보기도 싫은 고통 이었다보통 대학원은 2년에 24학점인데, 2년에 54학점을 했으니 얼마나 바빴겠는가  생전 처음 대하는 경제학 통계학 등등의 다양한 과목을 모두 영어로 강의 듣고 영어로 발표하고 영어로 논문쓰는... 발표할 차례가 되면 그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조차 힘들었다. 읽어야 할 원서가 너무 많아 늘 피곤했고 한 학기 내내 피곤해서 목이 쉬어 있었다. 임신 3개월에 입학을 했고 1학기가 끝날 즈음 방학을 틈타 둘째를 출산했다. 방학 때 몸을 풀었으니 운 좋게 휴학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힘들었던 당시의 심정을 덤덤히 밝힌다.
고대국제대학원 1기생 80명중 최고령자였다.
도와주는 동료들이 없었다면 졸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역학 석사논문을 쓸 때는 얼마나 공을 들여 썼는지 이후 7년을 우려(?) 먹었다고 실토한다.
너무나 힘들었던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사과정 이었다.
고대에서 석사를 졸업한 후 이제 어디 내놓아도 자신감을 가질 만큼은 성장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은 10년간 함께 산 시어머니께서 살림을 봐주시고 아이들을 키워주셨기에 가능했으니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22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jpg고려대 국제대학원 박사 학위 수여

  
언어학과 지역학으로 석사학위를 2개 받고나자 이젠 박사학위를 하고 싶었다.
2001년에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일을 해가면서 그 어려운 박사과정을 하자니 왜 이렇게 힘들게 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 희한한 것이 그렇게 힘들면서도 공부를 하는 것이 좋았다.
돈을 벌어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 공부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휴학을 하는 식으로 해 2001년에 입학한 박사과정을 2004년에 수료하게 됐다.
공부를 할 때는 늘 돈이 부족해 점심을 못 먹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행은 꾸준히 하면서 기행문을 제작해 지인들에게 돌리다가 수필가로 등단까지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열정이 가상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사업을 한다고 당시 처음 나온 DVR을 판매하러 동남아 원정에 나섰다.
필리핀,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을 도는 한 중소기업의 DVR팀은 열흘 동안 동남아 투어를 했는데 몇 대 팔지를 못했다.
사업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2002년도에는 인도네시아의 메가와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의 통역을 맡아 중요한 일을 함으로써 의전의 최고봉까지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외국인과의 인맥이 두터운 것은 통역하며 알게 된 엘리트들과 계속 연락을 한 까닭이다.
2004년에는 남편이 만든 비스마트 (Be Smart)라는 영어교육회사의 대표이사가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케팅을 했다.
남편이 만든 영어교육시스템을 전파하고 그가 지은 영어교재를 전국의 학원이나 방과 후 교재로 납품하는 사업이었다. 남편에게 열심히 배우고 전국을 손수 운전해 다니며 성실히 사업했다.
2년에 자동차 12만 킬로를 탔으니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녔겠는가 
전국에 학부모스터디그룹을 조직해 직접 가르치며 스스로 공부하는 주부들을 길러냈다.
비스마트 대표이사로 사업하며 (2007년).jpg▲ 2007년 비스마트 대표이사로 일하며

남편은 오산시가 교육청에 혁신교육도시로 지원할 때 사업계획서를 쓴 사람이다
.
교육 사업을 하면서 학부모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운영한 경험을 오산에 적용해 전국에서 유일한 지자체의 학부모스터디를 구성하게 됐다. 또 주변의 모든 것들이 교육의 소재가 되는 비스마트의 교육방법을 적용해 시민참여학교를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미군장병영어회화 역시 나의 제안으로 만들게 됐다. 오산시 혁신교육에 지역특화사업을 구상해 여러 가지 상을 받았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미군장병과 영어 회화.jpg▲ 미군장병들과 함께하는 영어회화

 
사업이 잘 되던 2008년 회사직원들과 함께 서해의 한 작은 섬으로 여름휴가를 갔다.
거기서 뜻하지 않게 한 직원이 바다에 빠져 숨지게 됐고 그 이후 겪은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다.
눈앞에서 사라져간 직원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열흘 동안 섬에 갇혀 남은 사람들을 챙기고 줄줄이 찾아오는 유족들의 거센 항의와 울부짖음에 무릎 꿇고 감내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유족에게 산업재해보상금을 받게 해 주었지만 구상권이 청구돼 몇 번의 재판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경험을 하게 됐다.
원래 유복한 집안의 자녀가 아니고 신혼시절부터 집 한 칸 없이 시작해 여기까지 왔는데 그나마 사업이 조금 되려는 시점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빚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평소 몸이 좋지 않은 남편이 병원에 20일간 입원하는 일이 생기게 된 20106월 비례대표로 의회에 들어오게 됐다.
사업도 좋지 않고 박사논문도 못 쓴 상태에다 남편까지 아픈 가운데 안민석 국회의원이 시장공천을 약속했다. 이미 4년 이상 정치를 권유해 온 안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시장공천은 무산되고 비례대표 시의원이 됐다. 친정이 되어준 민주당이 고맙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인정해준 안 의원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시 의원이 된 후 주어진 환경에서 의정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평도 받았다.
시민들과 함께 하며 왜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하는지 몸소 깨닫게 됐다.
출산보육도시에 걸맞게 태교음악회를 구상해 만들었다.
방문간호사들과 소외계층을 돌며 그동안 이런 현장이 있음을 몰랐다는 사실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울었다.
방문간호사들 또한 소외계층이라는 사실도 깨달아 그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키는데도 작은 도움을 줬다.
집수리봉사단이나 새마을 부녀회와 함께 하며 자신의 삶도 바쁘면서 봉사에 힘을 쏟는 이들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기반이 됨을 깨달았다.
오산이 살 길은 수도권의 아날로그적인 삶을 지향하는 도시라는 믿음으로 서랑동, 지곶동, 부산동을 잇는 문화벨트를 주창해 서랑동 문화마을 사업을 시작한 것도 보람이 있다지난해 말 썰매장을 개장한 서랑동 주민들의 승리는 단순한 썰매장 영업이 아니라 주민들의 진정한 단합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실에 크게 놀랐다. 앞으로도 좋은 대안을 마련해 공무원과 함께 시정발전을 도모하고 오산시민이 일체가 되는 아름다운 결과를 일궈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의정활동을 하며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한 20122월을 잊지 못한다.
매일 매일이 강행군이었고 10여 년간 하루도 발 뻗고 잔 적이 없다.
수많은 과정을 거쳐 박사학위를 받게 되자 눈물이 났다.
20년 동안 청학도서관, 오산중앙도서관, 수많은 카페 등에서 공부하고 논문을 써 간신히 받게 된 박사학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의 든든한 축이 됐다.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자 한국생산성본부, 안전행정부, 공항공사, 타지자체 등에서 국제의전이나 국제비지니스매너, 외국어 공부방법, 자녀교육, 공무원 교육 등에 관한 강의를 요청해 왔다.
의원이 되기 전에도 강의는 전공이었지만 이젠 좀 더 큰 기관에서 강의를 요청해 오는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강의일지라도 오산시의원으로서 강사가 되니 사람들이 오산을 기억하게 되는 즐거운 일이 일어났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불행한 일도 있는 법. 이런 인생의 순환법칙을 진즉에 알았다
두 번의 재판 끝에 없는 재산도 다 바닥이 났는데 지난해 3월에는 두 발을 수술해 4개월 동안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했고 수술한 지 2주가 지나 남편은 운동하다 척추골절로 입원하게 됐다.
엎친데 덮치는 인생의 순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목발에 의지해 남편을 간호하는데, 철인삼종과 히말라야 트레킹 등 도전을 즐기는 캐나다의 큰 딸이 축구를 하다 십자인대가 끊어져 한국에서 수술을 하게 됐다.
지난해 추석에는 애지중지하던 강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견디기 힘든 슬픔을 알게 됐다. 지난 6월부터 올 1월까지는 한 장소에서 똑같은 경우의 차사고가 세 번이나 일어났다.
그러나 늘 감사하며 산다.
남편은 쓰러진 사업을 일으켜 평소의 바람대로 대안학교의 교장이 됐다.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하나씩 꿈을 실현하고 있다. 남편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자신의 학교를 만들어 전교생이 악기를 다루고 운동을 하고 몇 개의 외국어를 하며 하루 종일 공부하면서도 매일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하고 있다아무리 힘들어도 절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결국은 이뤄내는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남편에게 나는 늘 부족한 아내라고 겸손해 한다.
우리 가족에게 바라는 바가 별로 없다. 남편에게 용돈이나 생활비를 바라지도 않고 우리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존재해 주는 것에 감사한다" 고 말하며  "앞으로 오산을 위해 몸바쳐 일하고 싶다. 나는 오산에서 태어났고 오산에서 50년을 살았다. 나는 오산사람이고 오산을 사랑하기에.."
22가족사진.jpg▲ 사랑하는 우리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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