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립운동가) 춘사 나운규 선생‘아리랑’ 제작․상영 후 조선영화계 대표 인물로 주목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독립군 출신 영화감독 춘사 나운규(羅雲奎, 1902.10.27. ~1937.8.9.) 선생을 2016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나운규 선생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 명동중학에서 수학했으며 1919년 3월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로 이주했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선생은 철도․통신 등 일제의 기관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했다.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했으나 일제가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과 관련자들을 체포했으며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해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했으며 백남 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았고 이후 ‘흑과백’, ‘장한몽’, ‘농중조’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주목받게 됐다. 1926년 10월 1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상영한 후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으며 ‘풍운아’, ‘잘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등을 제작했는데 특히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제작했던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의 엄격한 검열로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바꿔야 했다. 1931년 ‘말 못할 사정’ 이후 제작한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자 폐병이 재발, 병중에서도 ‘오몽녀’를 제작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나 폐병이 더욱 악화돼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아리랑’이 개봉됐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일제 강점기 제작하는 영화마다 일제의 검열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지만 선생은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하면서 영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1993년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경인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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