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복암 이설 선생이설李偰, 1850. 1. 24. ~ 1906. 4. 29.(음), 건국훈장 독립장 1963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차마 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바야흐로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하였는데 그 명분이 의거의 당에서 나왔기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 ◮ 가계와 관료 생활 복암復菴 이설李偰은 철종 원년(1850) 1월 결성군 화산면(현, 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에서 부친 조익祖益의 장자로 태어났다. 모친 광산김씨는 金在美의 딸로 ‘온화정숙’한 분이다. 자는 순명舜命(또는 순도舜徒), 호는 복암復庵이다. ‘복암’은 옛집에 돌아간다는 뜻으로 그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 사용했다. 본관은 연안이니 판소부감공파判小府監公派의 1대조 현려賢呂의 24세손에 해당한다. 연평부원군 이귀李貴(호 : 묵재黙齋, 1557~1633)는 그의 10대조다. 이귀는 성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했으며 광해군의 폐정에 아들 시백時白, 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물이다. 이설의 직계 선대에는 문과 출신자가 여러 명이며 호조판서, 목사, 군수 등 고관을 역임한 이가 있는 등 누대에 걸친 문신가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홍주지역의 명문가였다. 7살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읽고 9살 때부터는 족조인 이훈李壎(1804~1868, 자 : 치화穉和, 호 : 계암溪菴)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15살 때인 1864년 양부가 관직을 받고 상경하게 돼 족형인 이위李偉(1830~1872, 자 : 유문幼文, 호: 양소재養素齋)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1878년에는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를 올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점차 득세하고 척화하는 자들은 도리어 화를 입게 됨을 지적했다. 이어서 왜는 서양의 앞잡이(‘전도前導’)임을 밝히고 이러한 왜와의 화친을 주장함은 곧 매국행위임을 천명했다. 그 후 과거공부에 치중했다. 그러나 그의 관계진출은 학문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33살 때인 1882년에 생원시 복시에 합격했으며 1888년 겨울에 알성과 응제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인 1889년 12월 비로소 식년시 전시에 합격했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이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소중화’의 맥이 끊어지게 될 것을 염려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결행할 것을 주청했다. 이 상소를 올린 다음날인 6월 21일 갑오변란이 일어나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친일 내각이 조직되는 등 반식민지상태에 빠짐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낙향한 이설은 곧 이어 홍주부 일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에 휩싸이게 됐다. ◮ 사상 이설은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많이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기호지역의 유학자로서도 뛰어남을 그의 글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설은 율곡에서 송시열을 거쳐 한원진으로 내려오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라 할 것이다. 이설은 율곡 이이를 기호학파의 종장으로서, 나아가 자신의 학문의 선사先師로서 추존했다. 이설은 한원진의 주요 사상인 인물성이론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이에 따라서 그의 학문적 성격은 ‘척이단적斥異端的 화이론華夷論’과 절의론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설은 주자학을 철저히 신봉했고 천주교를 사학으로 보았으며 불교에 대하여는 ‘위정척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이를 비판했다. 그러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민씨 정권 주도하에 개화정책이 전개되자 그의 척사론은 약간의 변화를 보여줬다. 즉 유생들이 척사상소를 올려 화의和議를 배척했지만 오히려 정부에 의해 이들이 배척돼 유배에 처해지는 형세에 그는 척사의 대상을 일본에 집중시켜 ‘척왜론’을 주창했다. 이어서 일본군을 마땅히 물리쳐야 하며 그 이유로써 첫째 적이 우리를 무고히 억압하고 있으며 둘째 한 두 명의 신하를 제외하고 저자의 부녀자와 아이들 까지도 분노를 하고 있음을 들었다. 이설의 두 번째 사상적 특성은 충군애국사상이라 할 것이며 현실 비판적이었다. 그의 비판 대상은 심지어는 고종에까지 미쳤다. 그는 1906년 죽기 직전에 작성한 ‘유소遺疏’에서 망국의 임금(망국주亡國主)에 불과하다고 망국의 책임을 묻는 등 매우 과격한 언사를 동원해 고종의 실정과 부덕을 비판했다. ◮항일민족운동의 전개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설은 상소를 올려 이를 ‘역적의 변란’으로 규정하고 성토했다. 더욱이 단발령이 내리자 그는 김복한 등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를 찾아가 창의할 것을 권했다. 12월 1일 드디어 내종제인 김복한을 중심으로 청양의 유생 안창식․안병찬 부자와 채광묵, 부여의 이상린․이상천 형제, 홍주의 이근주, 홍산의 송병직, 정산의 이창서․정제기, 대흥의 박창로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주부 관내에 집결했지만 12월 4일 낮 그는 김복한과 함께 장교 유복길의 집에서 의병의 일을 논의하던 중 순검 김영준이 관찰사의 편지를 전함에 관찰부로 갔다가 곧 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이설은 면회 온 아들을 통해 밖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2월 25일 고등재판소에서 재판장 이범진의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했다. 차마 군부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바야흐로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했는데 그 명분이 의거의 당에서 나왔기에 마침내 체포됐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 그는 이른바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한 자의 무거운 죄”라는 명목으로 곤장 80을 선고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2월 28일 풀려나 3월 2일 집에 도착했다. 1905년 11월 27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맺어졌다. 이설은 식사마저 못할 정도의 중병을 앓고 있던 중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의연한 마음으로 목숨을 건 상소 투쟁을 전개했다. 신하된 자 죽음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죽음도 의리가 아니다. 필주설전筆誅舌戰이 무익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필筆과 설舌밖에 없으니 어찌하리오. 중봉重峯선생이 도끼를 잡고, 청음淸陰선생이 화의서和議書를 찢을 때 어찌 일이 성사될 것을 알았으며, 어찌 이름을 세우고자 했는가 이설의 상소운동은 와병 중에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형편이 못되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었던 최상의 방편으로 ‘거의토적擧義討賊’에 버금가는 구국의 결단이었다. 더욱이 그는 귀향한 후 안병찬 등과 협의해 민종식을 영수로 한 2차 홍주의병을 일으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병이 악화되자 마지막 상소인 ‘유소遺疏’를 작성해 문인인 이병량李秉良에게 올리게 하고 홍주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해 기세를 올리고 있던 1906년 5월 일제를 축출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고 말았다. ◮ 맺는말 그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정세 따라 척사의 대상과 방향이 변함을 볼 수 있다. 그는 17세 때인 1866년 우암 송시열 이래 지켜온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의 이론을 형성했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에 미쳐 이를 ‘수호조약’이 아닌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면서 ‘척왜론’을 주장했다. 그의 민족운동은 홍주의병 투쟁과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 투쟁으로 대별된다.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하고 낙향한 다음 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에 항거해 홍주의병에 참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해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 민종식과 안병찬 등에게 의병 봉기를 권했으며 홍주의병의 봉기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자료제공 국가보훈처) <저작권자 ⓒ 경인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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