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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당찬 여자 최인혜 ‘시련은 나를 강하게 해’ - 上 -

조홍래 기자 | 기사입력 2014/03/16 [10:46]

작지만 당찬 여자 최인혜 ‘시련은 나를 강하게 해’ - 上 -

조홍래 기자 | 입력 : 2014/03/16 [10:46]
최인혜는 지난 1964123일 오산의 남촌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엄마가 집에서 막내 동생을 낳던 기억, 엄마가 맹장염에 걸려 오산의 어느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의사가 맹장을 찾지 못해 다른 병원 의사가 와서 수술하던 기억, 둘째 동생이 아플 때 오산에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 엄마가 수원 도립병원으로 삼남매를 다 데리고 힘들게 버스타고 다니던 기억 등이 생생하다고 회상한다.
“6살 때 하얀 자갈이 깔린 철도 건널목을 건너며 너무너무 외롭고 무섭다고 느꼈던 기억, 7살 때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마루구석에서 두려워하던 기억, 초등 3학년 때까지 돈을 잘 벌던 아빠가 밤에 돌아와 배에 찼던 긴 돈다발을 풀어놓던 기억, 그 후 가세가 기울어 우울했던 어린 시절 등...ㅎㅎ 아직도 기억이 난다“6살이던 해 지금의 오산감리교회 안에 오산유치원이 생겼는데 입학한 뒤 적응을 못해 그만 두었다. 다음 해 다시 유치원에 들어가 노래도 배우고 무용도 배우는 것이 참 좋았다고 말하며 배시시 웃는다.
지금 오산에 사는 친구 중 유치원에 함께 다닌 친구는 다문화 전문가인 박 국장이다. 유치원시절에 가장 좋았던 것은 당시에 귀했던 카스테라와 흰 우유 한 잔의 간식시간 이었다그땐 유치원생이 한글을 깨치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친구 성은주는 한글을 아는 애였다. 선생님이 은주에게 겨울준비를 써 보라고 하시자 은주는 머뭇거림 없이 겨울준비를 칠판에 썼고 그게 부러웠던 나는 그 글씨를 외워가지고 집에 와 엄마 앞에서 겨울준비라고 썼다. 엄마는 깜짝 놀라 네가 글을 어떻게 아느냐고 하셨다. 다음해 성호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유치원선생님이 너는 반장감이라고 했다며 은근히 반장을 종용하셨다. 반장이 되는게 의무인 줄 알고 학기 때마다 반장선거에 입후보해 6년 내내 반장을 했다고 말하며 은근슬쩍 자랑의 보따리를 푼다.
“5학년 때는 전교부회장을 했고 6학년 때는 성호초 64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어린이 전교회장을 했다. 1학년 때 나의 첫 짝꿍이 지금 화성시 공무원인 공모씨고,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줄줄 외던 2학년 때 친구 홍성욱은 외교관이 됐다이웃의 지순이, 병희 언니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병희 언니는 이장수 체육회 사무국장의 동생이라 나는 동네오빠의 자전거 뒤에도 타보고 밤에 고기 잡는 데도 같이 다녔다고 말한다.
최인혜 6.jpg▲ 고 1때 가족사진


최 전 의원은 웅변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웅변을 처음 시작했는데 승공통일, 이승복 어린이 관련 웅변대회 등 웅변대회라면 전국 1등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4학년 때부터는 수원으로 웅변과외(?)를 하러 다녔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며 1등상을 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성적 우수상, 웅변상 등 상복은 많아 교육장 상을 타며 6학년을 졸업할 때 간추린 상은 170장이다.
지금도 아무리 많은 사람 앞에서도 떨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한 웅변덕분이라는 것이 최 전 의원의 설명이다.
학창시절 내내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성적은 좋았지만 실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라며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너는 서울대에 들어갈 거라고 하셨는데 나는 4학년 때 이미 서울대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수를 100점 맞아도 그것은 이해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많이 풀어봐 외워서 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5학년 때 백분율을 배우는데 이거 100으로 나누지 왜 100으로 곱하나?’ 하는 의문을 못 풀었고 지금도 모른다고 떳떳하게 말한다.
그래서 나의 두 아이들에게는 시험을 앞두고도 절대로 문제를 못 풀게 하고 외우는 공부를 못하게 한다. 공부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먼저라는 것을, 그렇게 해서 실력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 성적은 좋은데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강조하는 최 전 의원은 암기식, 주입식 교육은 절대 창의성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 교육철학이 됐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엄마숙제(?)일 경우 아이에게 숙제를 하지 말고 한 대 맞으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커가면서 점점 공부를 열심히 한다. 큰 딸 겨레는 토론토대학교 물리학과에 다니며 물 마실 시간도 없이 힘들게 공부한다. ‘엄마, 물리학은 너무 아름다운 학문이라 하다보면 눈물이 나...’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눈물이 난다. 둘째 민주도 지금 아빠가 하는 대안학교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른다고 교육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강조한다.
 
오산여중에 입학해서는 공부에, 과외활동에 어찌나 바빴는지 3년이 훌쩍 지나간 것 같다고 말한다.
장안사를 불러 경기도 노래대회에서 3등을 하고 여전히 웅변대회에 출전해 전국 1등을 휩쓸었다.
3년 내내 반장을 하다가 3학년 때는 전교회장을 했다.
당시의 오산여중은 명문이었다고 자부한다. 학생들은 줄넘기시간을 없애자는 의견을 꾸준히 냈으나 역대의 교장선생님들이 끝까지 줄넘기를 고수하셨으니 명문이고, 일 년에 2번씩 합창대회를 열어 문화예술에 협동심까지 고취하는 학교였으니 명문이라고 생각한다합창대회를 하면 내가 지도하는 반은 무조건 1등이었다. 박자와 음정에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는 나는 마음에 들 때까지 아이들을 가르쳐 매번 1등을 도맡아 했다. 합창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곡을 그 자리에서 선정해 제일 먼저 음악실에 달려가 우리 반의 곡목을 칠판에 적어 넣고 방과 후에 열심히 가르치니 다른 반이 우리를 따라올 수가 없었다
수다 섞인 자랑이 이어진다.
우리반 친구들은 인혜가 있으니 우리가 1등을 할 것이라 했고 다른 반 친구들은 최인혜가 없어야 우리가 1등을 하는데...’하며 볼멘소리를 했다고 중학 시절을 회상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오산여중 친구들은 내 인생의 보물들이다. 지금도 석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두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나며 친구들은 항상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다고등학교 선정을 하는데 담임선생님이 선발고사를 보는 안양여고에 응시하라고 해 안양이라는 도시와 인연을 맺게 됐다는 말과 함께 꿈 많던 여고 시절을 떠올린다.
당시 안양여고는 전국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여든 곳이라 외우는 공부에 익숙했던 나는 고교시절에 공부를 별로 못하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지 않으니 그 외의 것을 모두 잘해도 알아주는 않는 나라가 이 나라였다. 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우리 큰 애가 세계의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얼마나 똑똑한 아이들을 사장시키는지 알게 됐다고 말하는 최 전 의원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다.
공부를 잘해 보기도 하고 못해 보기도 했기에 교육을 폭넓게 이해한다. 나의 교육철학이 남과 다름은 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안양여고를 가길 잘했다는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더해진다. 우리는 밴드모임을 통해 또는 1년에 한 번씩 총동문회에서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다.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 분위기는 너무나도 소중해 안양여고라는 이름만 들어도 의욕이 솟구친다
고교때 웅번대회에서.jpg▲ 고교 때 웅변대회에서

가끔 왜 생소한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에 갔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한 질문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말레이시아에는 Merdeka배 축구대회가 있었다. 당시 차범근 선수가 출전한 경기를 보면서 갑자기 말레이어를 전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하지 않는 언어를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색다른 인생일 것 같았다고 말하는 최 전 의원은 주저함없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과에 응시했다. 4년 동안 마인어를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영어를 했는데 결국 언어를 전공으로 택한 것은 40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됐다. 언어를 하다 보니 경제학도 하고 싶고 역사도 하고 싶고... 그래서 결혼을 하고 3년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자가 결혼을 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지금도 내가 취득한 학위는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하다며 미소를 보인다.
대학시절에는 공부욕심이 많아 다른 과의 강의를 청강도 했고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기타를 조금 칠 줄 알아 클래식 기타반에 들어 연주부장이 됐다.
인혜는 손이 작아 기타 치는데 한계가 있겠다는 선배의 말에 오기가 생겨 열심히 치자 연주부장까지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만나는 기타반 동문들은 인생의 에너지가 된다고 말한다.
대학교 3학년 때 맡았던 통역은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인도네시아에 우리가 만든 전투기를 팔게 돼 인도네시아 공군 참모총장이 그 일로 한국에 방문했는데 그 부인의 통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 후 통역사의 길을 오래 걷게 됐다.
졸업을 하면서 외국계 대기업에 합격했지만 취업의 길을 포기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한다.
1년 동안 공부한 결과 이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후 결혼과 함께 대학원에 다니게 됐다
결혼 후 남편은 고시공부를 하게 돼 7년 동안 나는 친정에서 아이 키우고 공부하고 일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겨울에 결혼한 우리는 방을 얻을 돈이 없어 친정집 3층에 보일러를 놓고 신혼을 시작했다. 나는 친정을 탈출하고 싶어 결혼을 일찍 한 것인데 결국 돈이 없어 다시 친정에서 살게 됐다며 눈에 이슬이 맺힌다.
남편은 아내가 대주는 돈으로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일하면서 공부를 하니 고시합격이 힘들어 7년 동안 합격하지 못했다.
당신처럼 머리 좋은 사람은 오히려 고시합격이 힘든 것 같으니 그만두라고 했다당시에는 애기를 키우면서 밤에는 과외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매일 너무너무 피곤해 죽을 것 같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영양제를 챙겨먹었어야 하는데 그 생각은 못하고 걸핏하면 지쳐 쓰러지곤 했다고 회상한다.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가끔은 애기 분유 살 돈이 부족해 부모님께 의지도 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 천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게 됐다.
큰 애의 기저귀를 빨면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한 번도 절망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들이 집도 사주고 전세도 얻어주는 신혼을 시작하면서도 어렵다고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좀 이상하다두 남동생들도 결혼할 때 집에서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한국외대 대학원에서는 마인언어학을 전공했다.
논문을 쓸 줄 몰라 전공과 관계도 없는 남편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미안한 부분이다. 내가 지금 이만한 논리라도 갖추게 된 것은 100% 남편의 덕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족한 나를 가르치고 조언해 준다부부애를 과시한다.
22남편과 나.jpg▲ 사랑하는 남편과 둘이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외대에서 2년 반 동안 시간강사를 하면서 각종 기업체에서도 강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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