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염재念齋 조희제 선생(趙熙濟, 1873. 12. 10. ~ 1939. 1. 9. 건국훈장 애국장 1991)
“훌륭하구나! 야록을 만든 일이여! 한편으로는 충성스런 넋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여어 역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뒷날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바르게 하고 잇속을 챙기지 않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자를 물리쳐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도록 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교훈을 작은 도움뿐이라 하겠는가?” 1. 잊힌 애국지사 조희제와 ‘염재야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애국지사들의 항일활동 행적을 기록한 야사가 많이 편찬됐는데 대표적으로는 정교의 ‘대한계년사’, 황현의 ‘매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야사 외에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을 기록한 책으로 ‘염재야록念齋野錄’이 있다. ‘염재야록’은 전북 임실의 유학자인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가 을미사변과 한일합방 전후 그리고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거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이들의 행적을 정리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을미사변, 을사늑약, 한일합방 등의 전말과 각종 상소문과 격문·통문 등도 수록돼 있다. 2. 염재 조희제의 가계와 생애 조희제는 본관이 함안이며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염재念齋다. 1873년(고종 10) 12월 10일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寺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조병용趙柄鏞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인 김헌기金憲基의 딸이다. 조병용과 안동 김씨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조희제다. 조희제의 부친 조병용은 1836년(헌종 2)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고 학업에 정진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려다가 프랑스 군대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뒀다. 평소 거리낌 없이 일본을 배척하는 발언을 해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주의를 내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중대한 일에 관계 돼 이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면 이는 내가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했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해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서 “사내대장부라면 이처럼 어지러운 날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다 죽어야 마땅하다. 뜻한 일을 이루지 못하고 집안에서 죽게 생겼으니 이 서러움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하고는 1907년 1월 29일에 숨을 거뒀다. 이처럼 집안 대대로 유학에 종사하며 학문을 닦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가문의 전통은 조희제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학자로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한편으로는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스스로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염재야록’ 편찬이었다. 조희제는 상당한 재력을 갖췄는데 회문산 산세를 활용해 숨어 활동하는 의병뿐만 아니라 임실·순창·남원 등지에서 활약하는 의병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의병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그 때문에 일본 경찰의 감시도 삼엄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희제는 의병활동을 직접 도왔을 뿐만 아니라 가산을 털어 옥고를 치르는 애국지사들의 뒷바라지도 했다. 조희제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염재야록’ 편찬이라고 하겠다. 평생 ‘염재야록’의 편찬을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윤문 작업을 마치고 평소 교류하던 주위 사람들에게 부탁해 ‘염재야록’의 편찬을 일단락 지었는데 김영한이 교정을 보고 최병심이 서문을 썼으며 이병은이 발문을 지었다. 1938년 11월 조희제가 ‘염재야록’을 편찬한 사실이 발각돼 조희제는 물론 최병심·이병은·김영한도 임실경찰서로 연행돼 심문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특히 조희제는 혹독한 고문을 당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와 몸조리를 하고 있는데 상투를 자르라고 다그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그의 나이 60세 되던 해였다. 3. 항일활동 역사서 ‘염재야록’의 편찬 조희제는 위험을 감수하고 수십 년에 걸쳐,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충절 기록을 수집해 ‘염재야록’을 편찬했다. 조희제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 ‘염재야록’을 집필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본인의 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임실이라는 지역 상황과 집안 분위기 그리고 스승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조희제는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寺洞]에서 살았는데 전라북도 동부산간지대에 자리한 임실은 구한말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 되어가는 격변기에, 일제에 대한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의 한 가운데에서 조희제는 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이 조희제에게 의병의 역사와 일제에 맞선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항일의식이 강했던 집안 분위기나 스승 역시 ‘염재야록’ 집필의 한 요인이 됐다. 조희제의 부친 조병용은 투철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었다. 스승 송병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기우만은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을 펼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조희제는 항일의식이 강했던 아버지를 보며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을 배양하게 됐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항일활동을 펼친 두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항일의 방안을 실천하게 됐던 것이다. 최병심은 1934년에 지은 ‘염재야록’ 서문에서 집필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희제도 스스로 쓴 서문에서 집필 동기를 밝히며 세상에 널리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선비들의 충절 사실을 위주로 기록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희제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염재야록’을 편찬하려 하면서 기존에 편찬된 역사서의 장단점을 비교했다. 다른 지역에서 이러한 성격의 책을 편찬하고 있는 현황도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과 박은식의 ‘한국통사’ 등을 입수해 그 내용을 검토했고 ‘기려수필’의 저자 송상도처럼 다른 지역에서 항일사적을 모아 책으로 엮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염재야록’을 집필키로 마음먹은 조희제는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항일투쟁 사실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했다.‘염재야록’ 편찬은 조희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과정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해 마침내 1931년 건乾·곤坤 두 책으로 이뤄진 ‘염재야록’초고가 완성됐다. 조희제는 1931년에 초고를 완성한 다음 1934년에 각각 최병심과 이병은에게 서문과 발문을 부탁하고 서울에 사는 김영한에게 교정을 의뢰해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병은은 조희제가 비밀을 유지하며 ‘염재야록’을 집필해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갈까 매우 염려했다. 특히 이 답장을 불태워버리라는 당부로 끝을 맺는 대목에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병은의 우려대로 1938년 겨울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발각돼 조희제와 최병심·이병은·김영한은 임실경찰서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온 조희제는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조희제는 나름의 대책을 마련했다. ‘염재야록’ 원고를 권6으로 완성해 건乾·곤坤 두 책으로 편집했는데,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悳村隨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조희제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키는데 이는 ‘덕치, 곧 덕촌에서 그때그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을 파서 묻어뒀다고 한다. 조희제의 손자뻘이며 제자인 조현수는 조희제의 이웃에 살며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도왔다.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 연행됐으며 조희제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자결한 뒤에는 초상과 장례를 도맡아 치렀다. 그리고 해방된 이후에는 마루 밑에 있던 ‘덕촌수록’ 초고본을 꺼내, 이를 바탕으로 다시 편집해 ‘염재야록’이라는 표지를 붙여 건·곤 두 책으로 간행했다. 조희제는 ‘염재야록’을 편찬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또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읽히는 것도 보지 못했으나 이병은이 발문에서 “훌륭하구나! 염재가 ‘야록’을 만든 일이여! 한편으로는 천고의 충성스런 넋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여러 역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뒷날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바르게 하고 잇속을 챙기지 않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 자를 물리쳐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교훈을 작은 도움뿐이라 하겠는가?”라고 평했듯이 조희제가 편찬한 ‘염재야록’은 후세 역사의 귀감으로 길이 남게 됐다. 4. ‘염재야록’의 체제와 내용 ‘염재야록’은 권6으로 구성됐으며 책머리에 최병심의 서문과 조희제의 서문 그리고 끝부분에 이병은의 발문이 실려 있다. 조희제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송병선과 기우만의 제자로서 간재 전우의 문인 등을 위주로 항일인사들의 행적을 수록했다. 이들 인물들의 행적을 크게 나눠보면 의병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항쟁한 유형,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형, 은사금 거부· 호적입적 거부·납세 거부 등 일제 식민지통치에 나름대로 저항하면서 세상을 떠나 은둔한 유형 등이 있다. 조희제는 이처럼 ‘염재야록’을 편찬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국권을 상실한 뒤에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이들을 역사에 길이 남기려 했던 것이다. (자료제공 국가보훈처) <저작권자 ⓒ 경인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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