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 오영선 선생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지낸 이동휘의 둘째 사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 역임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을 지낸 석농 오영선 선생(1886. 4. 13. ~ 1939. 3. 10. 건국훈장 독립장(1990년))을 2016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오영선 선생은 부부(夫婦)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둘째 사위다. 부인 이의순(95 애국장)은 1913년 부친 이동휘와 함께 북간도로 망명한 이후 명동학교 교사를 지냈으며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긴 후에는 신한촌의 삼일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경기 고양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배일사상이 문제돼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1909년 캐나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북 성진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이동휘와 함께 북간도로 이주해 독립군 장교 등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1920년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기습 공격해 한인 주민 상당수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선생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긴 후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돼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했다. 이 무렵 개조파와 창조파(임시정부는 성립 초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921년 이후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를 유지하되 정부를 현실 조건에 맞게 개혁하자는 개혁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관을 건설하자는 창조파가 대립)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선생은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고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자 선생은 법무총장으로 선출돼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했으며 정의・신민・참의 3부를 설득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토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선생은 국무령 김구 체제에서 군무장에, 이동녕 체제에서 외무장과 군무장에 각각 임명돼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힘썼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하다 1939년 상해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경인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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