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슬프다. 우리 팔도의 창생이 남에게 맡겨져, 한판에 다 죽게 됨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아버지 할아버지가 모두 5백년 유민일진대 어찌 나라를 위한, 집을 위한 한두 사람의 의사가 없는가. 참혹한 일이다. 슬픈 일이다. 운이냐, 명이냐, 아! 우리 본조(本朝)는 국초로부터 모든 제도를 하나하나 옛 성왕들의 법도를 따라서 만들고 준수해 감으로써 전세계가 모두 문화의 나라라고 일컬어 왔다. 풍속이 아름답기는 당우삼대(唐虞三代 : 요, 순, 하, 은, 주)와 비할 수 있고 유학의 술업을 송나라 제현을 멀리 스승으로 삼아서 비록 하찮은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다 예의의 가르침을 숭상해서 군부(君父)의 급한 일이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 쫓아가서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중략, 격고팔도열읍 中에서-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제천의병에서 전군장으로 활약한 안승우 선생을 2016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화서학파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1896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던 망국적 위기상황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를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제천으로 옮겨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의 직책을 맡았다. 이때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해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했다. 제천의병은 단양으로 진군해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뒀다. 1896년 2월 화서학파의 종장인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선생은 전군장을 맡아 의병의 선봉을 이끌었다.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이 다수 집결해 있던 군사적 요충지 충주성을 공략해 장악하고 서울로 북상할 기반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소실되고, 보급로도 차단당하자 3월 초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의병의 전열을 정비하고 문경의 이강년 의병장 등과 함께 충주, 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이후 관군이 의병의 해산을 요구했으나 제천의병은 일제와 결탁한 집권세력이 개화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5월 26일 관군이 제천성을 공격하자 선생은 최일선에서 의병을 지휘해 여러 차례 관군을 물리쳤으나 우천으로 화승총을 쓸 수 없게 되면서 제천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선생은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돼 타살 당했다. 선생의 중군 종사로 있던 19세 청년 장수 홍사구도 스승을 지키다 장렬히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애국헌신과 충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경인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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