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통신=이영애 기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갑·한흥교·민제호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동제사는 1912년 신규식 선생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에서 조직된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로, 상하이 한인들의 단결과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889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한 김갑 선생은 1909년 영남지역 첫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했으며, 1917년 5월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했다.
동제사의 박달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동제사 중견간부로 활동한 선생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임시정부에서는 교통부 위원, 군무위원회 이사, 법제위원회 위원으로서 초기 임시정부 안정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24년 4월부터 임시정부 법무총장대리차장, 노동총판에 이어 재무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1933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광제의원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임시정부는 선생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한흥교 선생은 1885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해 1910년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를 졸업, 1911년 신해혁명(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참여를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신해혁명 국민군 참여를 계기로 신규식 선생 등을 만나 동제사가 결성될 때부터 가입·활동했으며, 항저우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제사 동지들의 의료지원을 전담했다.
이후 베이징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근무 중 만주, 몽골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지원업무에 이어 중국 육군 군의정(현 소령)등을 거쳐 1914년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1916년까지 상하이, 절강성 가남지역에서 의원을 개업, 동제사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신채호 선생과 중외통신, 신광신보 등을 간행하며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데도 헌신한 선생은 1927년 국내 귀국 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지역 의료 활동과 함께 북경, 태원 등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해방 후 귀국, 1967년 82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민제호 선생은 1890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해 한성영어학교 재학 중 국권을 빼앗기자(1910년) 항일운동 참여를 결심하고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해 동제사에 가입한 뒤 한중우호단체인 신아동제사에서 대외 협력업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69명의 의원에 선출된 후, 대한적십자회와 대한인거류민단 등 대중단체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9년까지 임시정부 대외업무를 수행하며 자금모집 등의 협력업무도 담당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함께 항저우로 피신했지만, 곧 병을 얻어 1932년 4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감갑, 한흥교, 민제호 선생은 동제사에 가입해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신 분들로,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주요 임무를 맡아 조국독립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갑 선생에게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한흥교 선생과 민제호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