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통신

“화성 제암리의 숭고한 정신 잊지 말자”

93세 할머니, “외할아버지, 손녀가 찾아왔어요”

이영애 기자 | 기사입력 2014/03/01 [17:22]

“화성 제암리의 숭고한 정신 잊지 말자”

93세 할머니, “외할아버지, 손녀가 찾아왔어요”
이영애 기자 | 입력 : 2014/03/01 [17:22]
 
제암리 할머니.jpg▲ 3월1일 화성시 제암리를 찾은 조금선 할머니는 민족 혼을 잊지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홍래 기자)

   
올해도 봄이 찾아오네
조금선 할머니(93)는 하늘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긴다.
온 동네 집들이 불태워져 논 바닥의 짚더미에서 잠을 자야했고 그때 학살당한 사람들 시신이 그대로 방치 돼 비가 오면 사람들의 뼈들이 여기저기 떠다니기도 했대. 저기가 할아버지 집터야, 할아버지 집에서 마을 예배를 최초로 시작했어라며 비석이 세워진 장소를 가리켰다.
조금선 할머니는 어머니가 유관순 열사와 함께 이화학당에 다니셨어. 일왕에 대한 인사를 거부 하는 등 일본에 대한 항거를 하셨었지라고 말을 이었다.
조회 때 전체 학생이 왕에 대한 인사를 하게 되더라도 절대 하지 말라고 교육 받으셨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제암리 교회야라고 강조했다.
조금선 할머니는 이날 막내아들 심우원씨 등 두 아들과 미국에 살고 있는 딸 까지 불러 제암리를 찾았지만 아쉽게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93세 조금선 할머니와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우리의 아픈 역사가 묻혀 지는 것일까 
역사를 증언해 줄 사람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몸은 불편해도 옛 기억을 더듬는 조금선 할머니의 음성에는 힘과 혼이 실려 있었다.
조금선 할머니의 외할아버지는 고() 안종후 선생님이다.
3,1운동 중 발안시위에 참가한 고() 안중후 선생님은 순국선열 23인 중 한 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암교회에서 순국,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분이다.
 
이 같은 내용은 여러 문헌에도 기록 돼 있다.
1905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 선생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동족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 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이어 제암리의 가옥 30여 채를 불태운 뒤 500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이 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km 밖까지 퍼져 나갔다.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사 스코필드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해 인근 공동묘지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됐다.
제암리교회는 1919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고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당이 만들어졌지만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은 광복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
19594월 사건현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된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9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뜻을 담아 보내온 1000만엔의 성금으로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
19829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이 실시돼 교회 옆에 마련된 묘소에 안장됐으며 다음해 7월 기념관과 새 기념탑이 세워졌다
 
조금선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순국선열에 대한 애도의 눈물인지,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에 대한 분노인지, 민족혼을 잊은 젊은 사람들에 대한 애타는 심정인지..... 하늘도 슬퍼 햇빛을 가렸다.
하지만 조금선 할머니의 눈에 고인 이슬은 제암리의 아픈 과거를 환하게 비췄다.
슬프지만 그 어느 보석보다 영롱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보였다.
어느 보석이 이보다 더 영롱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조금선 할머니는 이날 두 아들과 딸을 불러 화성시 제암리의 역사, 순국선열 23인 중 한분이자 외할아버지인 고() 안종후님의 발자취를 찾았다.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두 손에 태극기를 꼭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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