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둑립운동가) 문창범 선생文昌範, 1870 ~ (1938), 건국훈장 대통령장(1990)
오인(吾人)은 2000만의 조선국민의 명(名)의 하에 그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되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 모국(母國)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재보(財寶)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 문창범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러시아 니코리스크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중에서- 문창범은 1919년 3․1운동 당시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이에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받던 독립운동가였다. 1. 구한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계몽운동에 참가하다 문창범은 1870년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 죽기동에서 출생했으며 8세 때인 1877년경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 쁘질로프카 마을로 이주 후 중국과 한국,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살면서 러시아 군대의 납품업자로 많은 재산을 모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민족 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문창범은 ‘해조신문’이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 5월 26일 75호로 폐간되자 유진률, 차석보 등과 함께 2의 해조신문인 ‘대동공보’가 발간되는데도 기여를 했다. 2. 권업회에 참여하고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된 후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자들은 보다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구상하게 돼 당시 20만 명에 가까운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1911년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게 됐다. 권업회의 목적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양면전술을 취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문창범은 만주 길림에서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만주・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중심인물 39명과 함께 서명한 인사로 주목되고 있다. 문창범과 함께 서명한 인물로는 김교헌・김동삼・조소앙・신규식・정재관・여준・박찬익・박은식・이시영・이상룡・윤세복・이동녕・이세영・유동열・이광・안정근・김좌진・김학만・이대위・손일민・최병학・신채호・허혁・박용만・김규식・이승만・조성환・김약연・이동녕・이종탁・이동휘・이탁・이봉우・박성태・안창호 등 당시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돼 있었다. 3. 러시아 지역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다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한인들은 한인사회의 결집을 위해 귀화인, 비 귀화인 모두 참여한 대규모 회의를 소집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라는 상설적 중앙기관을 조직하고 문창범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문창범은 김치보, 김하석, 장기영 등과 함께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발기했고 대한국민의회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는 형식으로 조직됐다. 또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의 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조직은 국내외를 통해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의장에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인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 서기에 오창환을 선출했다. 문창범은 의장으로서 대한국민의회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해 대외적인 문제와 내정, 외교를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러시아령의 한인들은 문창범을 대통령으로 별칭했다. 4. 러시아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다 1919년 1월초 러시아 중동철도 연선지방으로부터 집결한 한인 200여 명이 니코리스크에서 니코리스크한족회 대회를 개최하고 시국에 대한 협의를 한 후 한족대운동회 명목으로 태극기를 내세우고 시내를 행진했는데 주둔 일본군은 이 시위를 해산하고 태극기를 압수했다. 이 시위를 주도한 한인들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인 문창범, 안정근, 박두우 등이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러시아 지역에서 1919년 3월 17일 오전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니코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했다. 문창범은 특히 니코리스크 코르사코프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했다. 독립선언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의 명의로 돼 있을 뿐만 아니라 선언서 끝부분에 “오인(吾人)은 2천만의 조선국민의 명(名)의 하에 그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되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 모국(母國)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재보(財寶)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라며 정부 당국자의 이름으로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즉 이 독립선언서는 대한국민의회의 간부명의로 된 ‘독립승인요구서’라고 볼 수 있다. 오후 4시에는 신한촌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2만여 명의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해가 진 오후 6시부터는 문창범의 지휘로 청년,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가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분승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과감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5.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에 선임되다 3․1운동을 전후해 조직된 대표적인 정치적 실체는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책 중 국내외의 연결 등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인 교통총장에 선임된 문창범은 취임을 위해 상해에 갔으나 상해 임시정부 측이 약속대로 정부를 해산치 아니하고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입장임을 확인, 문창범은 상해 임시정부 측의 개조 조치에 대한 항의표시로 내각 취임을 거절했다. 북경의 박용만과 신채호 등 반 임정파와 대한국민의회의 제휴는 이때부터 시작됐으며 후일 군사통일회의와 국민대표자회에서의 창조파의 태동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 문창범의 역사적 성격 문창범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니코리스크에 기반을 두고 귀화, 비 귀화인 등 모든 한인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에 이어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출됐으며 명실 공히 러시아 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문창범은 3․1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측근인 원세훈을 상해에 파견해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을 시도, 양측의 합의에 따라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의 해산결의를 선언했으며 자신도 교통총장에 취임하고자 상해에 갔으나 상해 임시정부측이 해산치 않고 개조함에 머물렀기 때문에 입각을 거부하고 러시아령으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재건 정비해 별도 세력을 형성했다. 문창범의 사망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상해에서 독살 당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일설은 1938년 러시아 감옥에서 이질을 앓다가 60세를 지나 세상을 떠났다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저작권자 ⓒ 경인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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