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통신

문화재청, 해시계 '앙부일구' 3점 보물 지정

조선 시대 서적 ‘자치통감’과 금동불상도 함께 보물 지정

이영애 | 기사입력 2022/02/22 [16:12]

문화재청, 해시계 '앙부일구' 3점 보물 지정

조선 시대 서적 ‘자치통감’과 금동불상도 함께 보물 지정
이영애 | 입력 : 2022/02/22 [16:12]
앙부일구(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경인통신=이영애 기자] 문화재청은 조선 시대 천문학 기구인 해시계 ‘앙부일구’ 3점 등 조선 시대 전적과 불교조각 등 5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번에 지정된 앙부일구(仰釜日晷)는 3점으로 각각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 중이며, 이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은 2020년 미국에서 돌아온 환수문화재다.

‘앙부일구’는 ‘앙부일영(仰釜日影)’으로도 쓰며, 솥이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을 한 해시계라는 의미다.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 이천(李蕆), 이순지(李純之) 등이 왕명에 따라 처음 만들었으며, 같은 해 10월 종묘 앞과 혜정교(惠政橋, 현 서울 종로에 설치됐던 다리)에 각 1대씩 설치했고, 조선 말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돼 궁궐과 관공서에 널리 보급됐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앙부일구는 현재까지 알려진 사례가 없으며, 지금 남아있는 앙부일구의 경우, 겉면에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 三十七度 三十九分 一十五秒)’라고 새겨진 명문의 위도 값이 1713년(숙종 39) 이후 처음 사용된 사실이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통해 확인되므로 제작시기 역시 1713년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3점의 앙부일구는 모두 황동금속제로서, 오목한 몸체를 4개의 다리가 받친 모습을 하고 있다. 

시반(時盤)에는 남북[午子] 방향에 북극으로 향한 영침(影針, 그림자 침)이 달려 있으며,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세로 눈금인 시각선이 15분 간격으로 있고, 가로 눈금인 24절기는 계절을 알려주는 13개의 절기선으로 표현했다. 

 

받침대는 4개의 다리와 열십자[十]의 다리받침으로 이뤄져 있으며, 4개의 다리에는 각기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모습을 새겼고 용 좌우에 구름 문양을 표현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을 포함해 3점의 보물 ‘앙부일구’는 제작기법에서 시반의 시각선과 절기선, 지평면의 절기글자와 24방향 글자에 적용된 은상감 기법과 정교하게 제작된 영침, 받침대에 새겨진 용무늬, 구름장식, 거북머리 장식 등이 우수한 조형미를 보여 숙련된 기술자가 제작한 최상급 앙부일구로 판단되는 점 태양의 그림자로 시간과 날짜(절기)를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해 편리성과 독창성이 뛰어나다는 점 조선 시대 천문과학기술의 발전과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과학문화재라는 점에서 보물로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다.

보물 ‘자치통감 권266~270(資治通鑑 卷二百六十六~二百七十)’은 1434년(세종 16) 편찬에 착수해 1436년(세종 18)에 완료된 총 294권 가운데 권266~270의 1책(5권)에 해당하는 서책이다. 

주자소(鑄字所)에서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현재까지 완질(完帙)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유사한 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으나, 다량으로 간행된 것에 비해 전해지는 내용과 수량이 많지 않아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한 자치통감은 이미 지정된 자료와 비교할 때 인쇄와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해 보존가치가 높으며, 권226~270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일본이다.

또 보물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芬皇寺 金銅藥師如來立像)’은 높이 3.4미터에 달하는 대형 불상으로, 조선 후기의 유일하고 규모가 가장 큰 금동불 입상이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건축 부재에서'분황사 상량기(芬皇寺 上樑記)'(1616년)와'부동명활성하 분황사 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1680년) 묵서(墨書)가 발견돼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광해군 1)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

분황사는 신라 시대부터 자장율사(慈藏律師), 원효대사(元曉大師) 등 여러 고승들의 수행처이자 중요한 가람(伽藍, 사찰)으로 인정돼 온 한국의 대표적 명찰(名刹)이다. 

원래 이곳에 봉안됐던 금동약사불은 정유재란(1597년)으로 소실됐으나, 신라부터 이어져온 약사도량으로서 분황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란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 우람한 형태미를 보이지만, 이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의 형태미를 보여주며,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이,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신·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616년과 1680년에 작성된 2건의 상량문을 통해 1609년 동(銅)으로 불상을 주조했다는 사실과 불상의 명칭까지 분명히 알 수 있어 이 시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높다는게 문화제청 설명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된 ‘앙부일구’ 등 5건에 대해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한다는 방침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